"어떤 감정인지 맞춰보세요." 교실 앞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연예인, 할머니, 고양이 등의 다양한 표정 사진이 올라왔다.
"기쁨" "삐침" "심심"…. 기자는 웃으면서 답변했다.
"그러면 우리 꼬마는 어떤 생각일까요?" 아이 사진과 함께 나온 질문엔 말문이 막혔다. 네 살 아들이 슬픈지, 졸린 지, 배고픈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거의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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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커덕 아빠' 기자, 첫 부모교육 받아보니
지난달 31일 기자는 서울 용산구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 열린 90분짜리 부모교육 특강에 참석했다. 부모교육은 가족 관계 증진, 아동 학대 예방 등을 위해서 부모에게 올바른 양육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용산 센터의 부모교육은 1주일에 한 번씩, 총 4주간 진행된다. 3주차에 접어든 이 날 주제는 '내 자녀를 위한 감정코칭'. 참석자 20명 중 기자를 뺀 나머지는 모두 여성이었다.
핵가족화가 되면서 많은 이들이 자녀와의 대화법, 교육 기법 등을 배우지 않은 채 '덜커덕 부모'가 된다. 백지상태의 부모는 자녀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에는 초·중·고교생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하루 '13분'이라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설문 결과도 나왔다. 하지만 도움이 될 부모교육은 걸음마 수준이다. 지난해 건강가정지원센터 등에서 실시한 부모교육(여성가족부 소관)에 총 30만7365명이 참여했다. 이는 자녀와 함께 사는 가구의 5.5% 정도다.
'덜커덕 아빠'인 기자도 이날 부모교육을 처음 받았다. 부모교육은 유치원 알림장에서나 봤던 단어다. 아이가 커갈수록 대화보다는 스마트폰을 쥐여주고, '밖에 나가서 놀자'는 말을 에둘러 피하게 됐다. 서울에서 세 살 딸을 키우는 아빠 김모(32)씨도 비슷하다고 했다. 그는 "아이와 둘이 있어도 엄마를 찾거나 뭘 하고 놀아야 좋아할지 몰라서 TV로 '뽀로로'나 틀어줄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날 강사로 나선 전윤경 영등포구청소년상담복지센터장은 "아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행동에는 명확한 한계를 둬야 하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평소 말을 듣지 않는 아들에게 '안 돼' '하지 마'라고만 소리쳤지 '왜' 그랬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는 후회가 머릿속을 스쳤다.
■ 부모ㆍ자녀 ‘소통’ 이것은 지키자
「 1. 아이는 부모와 닮았을 뿐, ‘똑같다’ 오해 말기
2.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금물, 일관성이 중요
3. 윗물 맑아야 아랫물도 맑아, 부부간 소통 먼저
4. 쌍방향 ‘대화’와 일방향 ‘말’은 달라
5. 눈과 입이 전하는 감정 일치해야
6. 어른이 아이 수준에 맞춰 말해줘야
7. 대화도 타이밍이 중요, 몰아서 혼내는 건 문제
8. 대화 후 행동 변화는 조용히 기다려주자
9. 아이 감정을 지레 짐작하는 건 피해야
도움말 : 전윤경 영등포구청소년상담복지센터장
」
전 센터장은 부모가 흔히 저지르는 9가지 실수를 조목조목 꼽았다. 기분이 좋거나 나쁨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지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식 대응은 아이를 더 혼란스럽게 한다는 지적이 제일 와 닿았다.
"기분 좋을 때는 아이가 숙제 안 하고 TV 봐도 '이제 끄고 숙제해야지'라고 웃으면서 말해요. 그런데 기분이 안 좋은 날엔 아이가 매번 받아쓰기 80점 받다가 95점 받아도 '다 못 맞았잖아'라고 소리치죠. 그러면 아이들은 내 감정을 살피기 전에 엄마·아빠의 감정을 먼저 살피게 됩니다."
'화성에서 온 엄마, 금성에서 온 아이'도 금물이다. 전 센터장은 "신생아 때는 울음소리만 듣고도 배가 고픈지, 아픈 것인지 다 안다. 하지만 아이가 자랄수록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잊고, 잘 모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아이가 어른 눈높이로 말하기 어려운 만큼 부모가 아이의 눈높이로 대화하는 게 더 좋지만 자칫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그 연장 선상에서 "학원 잘 다녀왔니" "숙제했니" 같은 질문만으로 대화를 나눈다고 착각하는 것도 불편한 진실이다. 아이들은 대화가 아닌 부모의 일방적인 말을 들을 뿐이다. 전 센터장의 설명을 들으니 평소 아들에게 하는 말이 '밥 줄까' '쉬하고 싶니' 'TV 틀어줄게' '이제 자야지' 정도인 게 떠올랐다.
전 센터장은 아이와 함께 자연스레 감정 소통 연습을 하라고 주문했다. 좋은 감정뿐 아니라 화나거나 짜증 나는 부정적 감정도 자연스레 표출할 기회를 줘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마주치는 식의 비언어적 소통은 딱딱한 대화의 윤활유다.
아들이 ‘아빠’를 불렀는데 피곤하다는 이유로 소파에 누운 채 심드렁하게 ‘왜’라고 답했던 시간이 부끄러워졌다. "아이의 감정은 곧 내가 아이에게 보여준 감정이다. 감정은 학습·전염된다. 자기감정을 잘 들여다보고 존중받는 아이들은 타인의 감정도 잘 이해하니 사회 적응력이 높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부모교육을 받은 엄마들의 표정은 밝았다. 배운 내용을 천천히 현실에 적용 중이라고 했다. 13세 아들을 둔 주부 윤경희(46)씨는 모범 사례에 속한다.
"예전에는 아프거나 힘들면 아이에게 무조건 소리를 질렀어요. 하지만 부모교육을 받은 뒤로는 '힘드니까 30분만 쉴게’라며 대화로 풀어가려고 해요. 아이도 그 전보다 많이 이해해주는 거 같아요. 요즘은 ‘내가 약 사다 줄까?’라며 먼저 말하죠."
아쉬운 점도 있다. 7세 딸 엄마인 한선영(39)씨는 "아버지 교육을 따로 많이 했으면 좋겠다. 남편도 시간 사정상 부모교육을 같이 듣지 못한다“면서 ”저녁ㆍ주말로 시간대를 늘려서 가족이 다 같이 참여할 수 있길 바란다. 성교육도 학교에서 하는 게 제한적인 만큼 추가로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윤경희씨는 "정보 공유 차원에서 조부모 대상 교육도 활성화됐으면 한다"고 했다.
지난해 육아정책연구소에서 영유아 부모 757명에게 물었더니 자녀 돌봄 기관에서 하는 부모교육에 불참한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63%)가 1위였다. 이들은 부모교육 활성화 방안으로 '맞춤형 부모교육'(58.8%)과 '찾아가는 부모교육'(17.3%)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에 따라 여가부는 맞벌이 가구 등을 위한 온라인 동영상 교육, 찾아가는 부모교육 프로그램 등을 강화하고 있다. 용산구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도 올 하반기 아버지를 위한 부모교육 등을 추가로 계획하고 있다.
부모교육 다음 날 기자는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의 학부모 참관 수업을 마치고 소통 연습을 해봤다.
"아빠랑 시간 보내도 재밌지?" 아들은 손을 잡은 채로 크게 답했다.
"응. 김밥도 만들고, 집도 만들고 좋았어. 오늘은 회사 안 가는거지?"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 부모교육 프로그램은 어떤 게 있을까
「 -사례관리형 부모교육 '가족행복드림'
-찾아가는 부모교육
-소규모ㆍ지속적 부모교육 '어깨동무 부모교실'
-부모교육 특강 '대한민국 부모학교'
-가족캠프 내 부모교육(한국청소년상담개발원ㆍ국립평창청소년수련원)
-인터넷ㆍ스마트폰 중독 예방을 위한 부모교육
-전국 청소년상담복지센터 내 부모교육
* 부모교육 매뉴얼은 '여성가족부 홈페이지'(www.mogef.go.kr) 내 부모교육자료실에서 다운로드 가능